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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case/Literature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문학동네

by Neuls 2022.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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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는 지적이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하는 존재인 것처럼 치장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명료한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복잡하고 내면의 갈등을 통해 힘들어하는 존재일 뿐이다. 항상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며, 부지불식간에 생겨나는 스스로의 욕구와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심리학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이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로 자아라 표현하기도 하고 내면의 이야기, 또는 그 무엇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 대표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적 나도 모르게 만나게 되고 순순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자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방황과 여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린 소년의 성장기 이야기이거나 성장통에 관련한 심리소설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어보인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어렸을 적 이 소설에 대해 들은 바 있었고 - 읽어보진 않았다 -  비슷한 내용으로 이해했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40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읽어보는 '데미안'은 단순히 성장통에 관련한 젊은 이야기로 한정 짓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과 의미를 담고 있다.

 

 

 

 

1. 수순 내면과의 만남, 이후 찾아오는 떨림과 두려움

그럼 그 무엇, 또는 자아라고 불리우는 것을 만나거나 경험하게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물론 그 경험의 시점을 정확하게 찾거나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또는 느끼게 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에선 한 아이의 거짓말로부터 시작된다. 또래의 아이들과 친해지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 했던 작은, 아니 큰 거짓말 하나로 인해 그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순식간에 그의 안전했던 생활과 평온했던 주변은 폭풍의 바람으로 휘날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한 소년의 도움으로 다시금 평화를 찾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삶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욕구를 드러내기 위한 행동을 통해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내면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만남은 너무나 짧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으로만 남게 되고 그 경험은 평생 그 사람의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인식을 단순히 추억만 하거나 그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너무나 기분나쁜 경험이었고 순수하고 밝고 맑기만 했어야 할 유년 시절을 훼손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 내면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또는 방황.

하지만 헤세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언가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듯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기저기 헤매기 시작한다. 새로운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새로운 삶이 첫 만남의 기억을 잊게 만들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허나 인간의 삶이라는 것인 또 다른 자리, 또는 경험이 그 내면과 다시 만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찾아가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허나 이 과정은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 자아 또는 내면 -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이 과정을 스스로 왜 거치고 있는지도 모르며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해 낼 수 있는 일도 아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의 우리 또는 인간은 방황하는 듯 보여지기도 한다. 주변의 어른들이 또는 사회의 시선들이 걱정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곤 한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제자리를 찾고 현실 속에서 해야 할 일들과 과제들을 충실히 수행하길 바랄뿐이다.

 

 

 

 

3. 꿈 속에서나 만났던 기억. 아련함

그 방황의 기간과 내용이 어떠하 듯 언젠가는 그것과 다시 만나게 된다. 스스로의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예전에 느꼈던 불안함과 두령움, 또는 떨림은 어느새 없어지고 그것과 대면함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아프락사스,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와 하늘로 비상하려는 한 새의 모습처럼, 이제 막 나왔음에도 초롱초롱한 눈 빛으로 자신의 날개를 힘차게 흔드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럼 이러한 아프락사스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에게 놓여져 있는 현실의 한계와 유아적 심리를 벗어나 성인인 되거나, 어떤 존재가 되는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무엇이 감추어졌던 가면 또는 껍질을 깨고 나와 내 스스로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는 시작을 뜻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를 알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 앎을 통해 다시 스스로를 완성해 나아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본다는 것, 내면 또는 자아를 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증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쉬운 듯 보이면서 어려운 이야기였다. 괴로웠던 유년기의 경험들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하였고,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맞닥드렸던 내면의 모습을 다시 꺼내보기도 하였다. 살아오면서 자신있게 감춰왔다고 생각하지만 내 스스로에겐 그렇지 못했던 나약한 존재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했던 사람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혼자 외롭다는 생각만으로 살아왔던 과정에 누구도 주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전반적인 번역의 느낌은 부드럽고 잘 읽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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