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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case/Literature

크눌프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by Neuls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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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사춘기는 늦게 찾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때 일명 방황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면 나의 경우 20대부터 시작하여 30대까지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칙적이고 사회적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교육과 훈육을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 사고와 삶을 살아가고자 하던 나의 의지는 그때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평범하지 않던 가정사 역시 이러한 삶의 방황을 부추겼던 게 사실이다. 좋은 일이 있다면 힘든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다면 괴로운 일이 반복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모습일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내가 느끼기엔 힘든 일과 괴로운 일들의 반복이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터널의 한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우울감에 빠져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삶의 어두움은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고,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는 삶, 어쩔 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하는 삶을 강요하게 된다.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정감이나 느낌을 받지 못하고, 다시 떠나야 하는 준비를 해야 했기에 그 순간이 괴로움의 경험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 손재주와 잔머리는 있었기에 잠시 거처하는 곳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속에서 내가 얻어야 하는 것들, 즉 생존 또는 살아가기 위해 얻어야하는 기술 등을 금방 습득할 수 있었고 어디서든 쉽게 적응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안정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세운 그 어떤 것이 모래위에 세워져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금방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는 듯, 다시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미리 해두곤 했던 것이다.

 

그런 생활을 해 오던 30대 초반,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를 만나면서 상당히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니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하나 하나가 나의 모습이었고, 나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한스 기벤라트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고, 에밀 싱클레어를 통해 나 스스로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선 싯다르타를 통해 지나 온 삶의 모습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러한 헤세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위로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크눌프였다.

조금은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던 한 사람. 마음의 이야기를 시로 지어내며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자리, 또는 자신의 형상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 어는 한 곳에 정착할 듯 보이면서도 그곳에서의 삶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사람. 자신을 만나기 위해 또는 자신을 완성하기위해 끊임없이 방황하지만 결국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지 못하는 한 인간의 모습.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방황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회적 규범, 또는 규칙들. 꼭 무언가를 성취해야 만 할 것만 같은 분위기. 만약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이며 가치 없는 존재로 느끼게 만드는 사회.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 강요하고,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이러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러한 방황이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 방황 속에서 받게 되는 상처와 고통은 어디서 치유받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그동안 살면서 항상 고민하던, 아니 위로받고 싶어하던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헤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로를 통해 이러한 방황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듯 외친다.

 


보아라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항 너와 함께 했었다. P.134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이제는 그동안의 방황을 그만두었냐고.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물어 온 그 사람을 보면 희미하게 웃어주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마음 속으론 아직도 방황하고 있으며,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아 아직도 방황을 하고 있다고 외치면서. 다만 그 방황의 방향을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 나 속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이제 다시 떠나고 있다고 말이다...

 

 

 

P.S.

길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강한 인상과 느낌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헤세의 책 중에서 최고라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혼란스러울 때면 책장에서 꺼내어 읽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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