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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case/Literature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열린책들

by Neuls 2022.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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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엄마의 지갑을 보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지갑 속 포개져있는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를 보고 없어진 것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천 원을 꺼내 급하게 꾸깃거리며 집어넣었다. 그 순간의 감정. 심장이 요동치며 손이 떨렸다. 희미하게 등 쪽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 보다 호주머니에 들어간 천 원짜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는 200원에서 비싸야 500원 이었으니 꽤 많이 사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조심스레 과자 한 봉지를 집어 든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얼굴이 붉어지고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호주머니에서 수줍은 듯 또는 누군가 몰라야 하는 듯 조심스레 천 원을 꺼내어 내민다. 다행이 아주머니는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느라 정신이 없어 내 얼굴이 어떤지 살피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게에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던 식은땀을 식혀준다. 그리고 손에 든 과자봉지 하나를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식하며 급 입맛이 가셨다. 그리고 때마침 지나가는 친구에게 그 과자를 선물로 주며 약간 우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나 이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들이나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 때를 말이다. 어떤 이는 그런 생각이 들어도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중간에 멈춰 다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그러한 생각이 문득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규칙을 교육 받아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래부터 인간에게 숨겨져 있는, 우리도 모르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과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들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일명 어른이란 이러한 상황들과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잘 극복하지 못하거나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들이나 생각이 남들에게 잘못이라는 지적을 받거나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스스로를 바라보고 나를 찾아가는 것. 또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경험과 갈등 속에 살아간다. 그 속에서 때론 자신의 외부에 맞춰가며 안정감을 얻을 때도 있고, 스스로의 자리를 위태롭게 감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나의 마음, 나의 생각을 잘 읽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잊어버린다. 아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나의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보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나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약하고 부끄럽다. 이것이 드러날 때를 두려워하며 외부의 시선으로 지적받거나 문제제기를 받을까 전전긍긍한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의 모습에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대하며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추구한다.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되면 당황스러워 한다.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지 오래되었고, 자신의 가면 조차 어떤 모습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냥 그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물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비난하거나 잘 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일 수도 있고, 그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의 넓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아직 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나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어떤 지를 잘 알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이 있다면 더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가면으로 가려진 연약한 자존심이 아닌, 단단한 토대위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스스로의 자신감을 찾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흔들림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생각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흔들려 괴로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 하나하나 단련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래서 하나 하나의 변화에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또다른 삶의 넓이를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이 마흔이 넘은 이 순간에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하나의 사건과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인지를 생각한다. , 아직도 나는 나를 모르고 있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젊었을 적의 폭풍 같은 감정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감정을 되새기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고민한다. 물론 싱클레어처럼 또는 막스 데미안처럼 좀 더 빨리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멀어 보인다. 다만 언젠가 삶의 끝자리에서 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긍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것을 잘 정리 할 수 있다면 좋겠다.

 

 

P.S.

어떤 이들은 데미안이라는 소설이 한 청년의 성장기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넘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어떻게 나의 모습을 찾아 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생각한다. 그래서 4번 째 읽고 나서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읽을 때마다 집중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소설을 다시 읽는 다는 것. 그것은 조금은 특별한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네 번째로 읽은 것이 작년 이맘 때였다. 다 쓰고 보니 예전에 써놓은 글이 이미 올려져있어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다르기에 다시 올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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