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urniture
  • Wood
  • Tool
Bookcase/Literature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 문학동네

by Neuls 2022. 2. 4.
728x90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 사랑을 하여 태어나지만, 나라는 존재가 생성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다. 어떤 이들은 태어난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때론 어디도 보이지 않는 신에게 의미를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의 존재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과도한 의미부여 일 뿐이다. 오히려 태어난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생을 발견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자신 앞에 놓여진 삶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 사회, 종교, 도덕, 민족, 인권 등 나도 모르는 사이 덧씌워지는 것들이 있다. 그 씌워진 것들로 인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좁아지고 좁아져 무언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질 뿐이다. 더 나아가 우연이라는 변덕스러운 운명이 그 작은 선택마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부지기수 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감춰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흰색이 감추고 있는 검은색과 검은색에 포함되어 있는 흰색처럼 덧씌워진 것들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나의 생을, 나의 삶을 조종하여 얽어맨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은 그 얽어매진 모든 것들 속에 좌절하여 살아가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작은 틈을 찾아 헤맨다. 때론 전혀 다른 곳, 또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자신의 위로로 만들어간다. 이러한 위로들의 이름이 행복이 되기도 하고 때론 사랑이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삶을 배우고, 생을 채워간다. 때론 두렵기도 하고 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싸여 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도 한 걸음, 두 걸음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행복과 지금의 사랑으로. 그리고 마지막이 되었을 때, 이 지난한 삶의 끝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의 무언가가 없고 그냥 편히 쉬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후세계, 또는 다른 삶의 시작이 아니라 그만큼 충분히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모모의 고백처럼 아직 경험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누군가 나의 존재에 대해 불러주고 인정해준다면 좋겠지만 때늦은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렇게 살아냈으면 좋겠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처럼...

 

 

PS. 간단히 읽고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소설이었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까지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들이 항상 그렇듯 중반이 넘어가면서 그 깊이가 느껴지고, 등장인물들이 이해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전형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소설. 아마도 이후 두세 번은 읽게 되리라 생각되는 그런 책이다. 그리고 개인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존엄사는 중요하다 생각한다. 




 

 



728x90

댓글